까탈스런 동행인
호치민에서 무이네로 이동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그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법은 슬리핑버스다.
하지만 바퀴벌레가 나오고, 키가 큰 사람은 다리조차 펼 수 없는 불편한 이동수단임을 알고 있었고,
무이네에 도착하고 몇시간 뒤에 사막 투어가 예약되어 있었기에 아버지의 체력을 고려해 우리는 차량을 렌트했다.
호치민 공항에 도착해서 우리를 픽업온 차량은 12인승정도 되보이는 커다란 벤.
아무도 없는 커다란 벤에 3명이 누워서 무이네까지 이동할 수 있었으니 나름 쾌적한 여행 아닌가.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나라라 그런지 메일 하나를 보내도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았는데 그 노력을 보상받는 기분이였다.
여기서 무이네까지 꽤 긴 시간 차량을 타고 이동해야하니 한숨 주무시라고 말하고 각자 누웠는데 다소 노기가 서린 목소리가 들린다.
[차에서 잠을 어떻게 잔다냐!!]
[아버지 차가 큰 편이라 누우실 수 있을거예요. 새벽에 도착하니까 불편하시더라도 눈좀 붙이세요.]
이럴 때 보면 언니는 성인(聖人)같다.
사실 우리는 아버지가 시력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차를 끌고 전국 곳곳을 누비며 다니셨고,
더 좁은 차 안에서도 꿀잠을 주무셨고, 이정도면 꽤나 편한 여행이며, 당신도 동의한 일정임을 알고있었지만 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중간에 휴게소에 도착했고, 옆 슬리핑버스에서 몸을 구기며 이동했던 승객들이 기지개를 켜며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차에서 한숨도 안주무신 아버지를 위해 언니가 간식거리를 사드린다고 함께 상점으로 갔고 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는데
언니와 아버지는 건망고와 맥주를 사왔고 그렇게 그는 휴게소에서 맥주한캔을 원샷했다.
장거리 이동은 피곤하고 갈증나는 법이지만, 한숨도 안주무시고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가 힘드실텐데 술까지 드시다니..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아버지에게 투어 일정을 강요할 마음이 없었고
숙소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힘드시면 쉬시게 하고 우리끼리 사막을 다녀오자고 언니와 사전에 약속을 했었던게 떠올랐다.
아. 아버지는 숙소에서 쉬실 요량인가보다. 하긴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혼자 차분하게 새벽을 맞이하는것도 꽤 좋지.
새벽 2시. 숙소에 도착했는데 프론트에 사람이 없다.
프론트 벨을 누르자 밖에서 숙직을 서던 경비로 보이는 남자분이 방 배정만 해주고 사라지셨다.
여태껏 그러했듯, 아버지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빨리 와이파이를 연결하라며 성화.
지금은 프론트에 직원이 없어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 방법이 없다고 차분히 설명해 드렸는데 화를 내신다.
[아 빨리 와이파이 연결하란마다!!!!]
내가 무슨 IP TIME도 아니고, 처음와본 다른 나라의 호텔 와이파이 패스워드를 무슨 수로 찾으라는거지?
그리고 애초에 와이파이 패스워드가 새벽 2시에 필요한 이유가 게임 때문이라니.
10살짜리 초등학생도 아니고 해외까지 와서 모바일게임에 접속 못한다고 언성을 올리고
그 와이파이를 찾으러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아무도 없는 로비를 다시 내려갔다오고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온건지 왕이되는자를 모시고 여행을 온건지 분간이 안가는 순간이다.
환상적인 일출과 환장할 투어
투어시간에 맞춰 일어났는데 어지럽고 힘이 쭉쭉 빠진다며 여기서도 약국을 찾아봐야겠다신다.
주무시기 전에 큰 글라스로 30도가 넘는 술을 두잔이나 드셨는데, 솔직히 그 정도 양이면 멀쩡한 성인도 어지럽고 힘이 빠진다.
한국에 혼자 계실때도 큰 컵에 독한 소주를 드셨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해외에서 직면한 아버지의 알콜 의존증은 숨이 막힌다.
이미 부온마투옷에서 술에다 약을 드시는 모습에 있는대로 내장이 뒤집힌 언니랑 나랑 같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는
한숨만 푹푹 쉬시고는 미안하다. 하루에 앞으로 2번만 술을 마시마. 그건 어쩔수가 없어야. 라고 하신 약속은 호치민에 두고 오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났으니까 한잔, 점심먹으면서 반주로 한잔, 기분좋으면 또 한잔, 저녁에 저녁먹으면서 한잔, 자기전에 잠 안올 때 한잔
그리고는 어지럽고 기운이 없으니 간이 안좋아 그렇다고 비타민을 사고, 설사를 한다고 지사제를 사고
술을 그정도 양을 드시면 앞길 창창한 20대도 어지럽고 기운없고 설사를 하게 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너무 아프게 말씀드리게 될 것 같아서 입을 꾹 닫는 것을 선택했다.
처음 타보는 지프차. 큰 엔진 소리가 귀에 거슬릴법도 한데 새벽에 맞는 시원한 바람과 하늘에 이따금씩 떠있는 별들이 설레게한다.
그래, 잠깐이나마 나쁜 기분들은 잊어버리고 입꼬리 올리고 다시 잘해드려야지. 하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데
자꾸만 앞좌석에 앉은 아버지의 담배재와 가래침이 뺨을 때린다.
의도치 않게 세수를 잔뜩 하고 사막에 도착했고, 해가 뜨기 전이라 캄캄한데 아버지가 어디론가 또 사라지셨다.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데다 어두워서 서로 얼굴을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대체 어딜 가셨는지.....
자유로운 영혼도 정도껏이지. 당신이 말 없이 사라지면 우리는 찾는 역할인가.
가고싶은데가 있으면 같이 저기 가보자 해도되고, 최소한 어디 가겠다 말이라도 해줄 수 있는건데..
당신을 걱정할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다.
어느새 해가 뜨고 아버지를 찾아 두리번두리번.
혼자 아무도 없는 저~ 멀리까지, 당신이 내 손톱만하게 보일만큼 멀리 가서는 사진을 찍고 계신다.
그래도 시야가 트이고 어디에 계신지 보이니 한시름 놓이고, 아름다운 주변 풍경이 슬슬 눈에 들어온다.
사실 사막은 처음 와보는데, 입자가 아주 고운 부드러운 모래가 발에 닿을때마다 시원하고 부드럽게 사르르르 녹아내리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고 기분이 좋은 곳이 아닌가.
이제 내 마음도 여유를 좀 가져볼까.
사진도 찍고 모래에 앉아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어느새 원하는 사진을 다 찍은 아버지가 빨리 다음장소로 이동하자고 재촉하신다.
지프를 운전하는 기사가 데리러 와야 다음 장소로 갈 수 있다고 설명해드렸는데
[그럼 빨리 오게 해야지 여기 한정없이 서있으란 말이냐?]
여기 도착한지 이제 한시간도 채 안 지났고, 그 시간중에 80%는 아버지를 찾는데 사용했는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넘어간다.
언니가 또 차분하게 한 장소에서 머무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거다. 힘드셔서 그러시는거냐 여쭤보면서
아프시면 일정 중단하고 돌아가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대답도 안하시고는 한숨만 푹푹.
이토록 환상적이고 좋은 곳에서 대체 뭐가 불만인지 이해할 수 없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 아버지가 자꾸 어지럽고 힘이 없으시다고 해서 속이 시원해지게 탄산음료라도 드셔보라고 권했다.
느낌 뿐인걸 알지만 의외로 효과가 좋으며, 단게 들어가니 조금은 힘이 나실거라고 언니가 차분하게 아버지를 달래는데
음료수는 됐다며 술을 찾으셨고, 여기서 드디어 언니의 분노가 터져버렸다.
[술을 드시지 말라는게 아니다. 간이 안좋으면 간을 쉬게 해줘야지 쉼없이 술먹고 약먹고 술먹고 약먹고 대체 언제까지 이러실거예요?]
[내가 체질이 저혈압이고 간이 약한데, 그때는 술을 좀 먹어주면 몸이 회복이 되서 돈단마다!]
와 내가 돌아버리겠다.
대체 어느 의서에 저혈압에 30도가 넘는 술을 글라스로 한컵씩 마시는게 좋다고 추천한단 말인가.
그리고 한잔 마시는게 좋다손 치더라도 당신의 음주량은 이미 차고도 넘쳤는데, 이제 술을 마시는데도 이유가 필요한가.
인터넷에 찾아보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맹신하며 스스로의 몸과 자식들의 기분과 가족여행의 일정을 날려버리는게 이제는 대단하기까지 하다.
레드샌듄으로 이동하는 길에도 나는 앞좌석에 앉은 아버지의 담배재와 침을 맞으며 이동했고,
결국 술을 사는데 실패한 아버지에게 음료수를 권하며 그래도 당분이 들어가면 몸이 좀 나아지실거다.
좋게 권해보는데 됐다고 입을 꾹 다물고선 말 한마디 없다.
레드샌듄 도착해서 기사가 몇분까지 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안듣고 또 혼자 사막으로 성큼성큼
언니가 너무 화나서 말도 하기 싫다고 니가 가서 아버지한테 몇분까지 가야한다고 얘기해드리라고 시켰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아버지를 따라 올라가는데,
레드샌듄은 침엽수와 쓰레기가 있는 곳이라 발이 푹푹 빠지는데 아프다.
[아버지 몇분까지 가야한대요.]
그는 대답이 없고, 나만 혼자 머쓱하다.
더는 사진 찍을 기분도 안나고 억지 웃음도 안나온다. 귀국하고 보니 핸드폰에 레드샌듄의 사진이 단 한장도 없다.
가족여행은 사치였던걸까.
세상 제멋대로였던 투어가 드디어 끝나고, 각자 분노로 가득차 호텔 돌아갈때까지 서로 침묵.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처음 내뱉은 한마디 [와이파이 패스워드]
변하지 않는 패턴이 지긋지긋하다.
아침에 일어나 술, 일정을 소화하는 내내 빨리빨리, 점심에 또 술, 또 빨리빨리, 숙소에 돌아오면 와이파이, 왕이되는자, 다시 저녁에 술
그가 일정을 내내 서두르는 이유 또한 그 망할놈의 갈이단과 몽골군의 시간을 놓치면 안되서.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자식들과의 첫 해외여행보다 갈이단과 몽골군. 그깟 게임 데이터 1010111010이 더 중요하신걸까
잠깐 해변가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언니는 나를 통해 아버지의 아침식사를 챙긴다.
[아침 드셔야죠.]
[.....]
[아침 드셨어요 아버지?]
[.....]
필요할 때만, 하고싶은 말이 있을때만 열리는 저 입은 참 편해서 좋겠다.
그리곤 다시 또 술을 꺼내서 컵에다 가득 졸졸졸
참다 못한 언니가 다시 폭팔해서 술병에 있는 술을 화장실에서 집어던지고 악을 지른다.
그래 오래 참았지. 발화점이 높아서 그렇지 그녀의 인내심에도 한계는 있다.
오히려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누구보다 가장 무섭게 타오르는데 아버지는 아직 그걸 모르시는 것 같다.
언니가 화나서 방을 나가버렸고 따라 나갔는데 따라오지말라고 너도 똑같고 꼴도 보기 싫다고 화를 낸다.
나는 좋은 사람인척 입 다물고 있고, 언니만 중간에서 화내고 어르고 달래고 했다고 생각되서 나한테도 화가 난 것 같은데
사실 좋은사람이고 싶어서 입을 다문게 아니라, 내가 말을 꺼내는 순간 아버지 심장 깊은데까지 후벼파서 도려내버릴까봐
가족한테, 부모한테 해서는 안될 말을 하게될까봐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언니가 나한테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하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과 속상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버지는 한참 말이 없이 한숨만 쉬시더니 갑자기 가방을 주섬주섬 싸셨고 당신은 한국으로 먼저 갈테니 지내다 오란다.
[아니 아버지, 미안한게 있으시면 사과를 하시고 서로 풀면되지 가족끼리 이게뭐예요? 가신다고요? 어디를요?]
[내가 잘못했다고야?? 나는 내가 알고있는 범위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을 했던거고 설명도 다 했어야. 한두번은 실수겠거니 할 수 있지만 그게 넘어가면 그건 더이상 실수가 아닌것이다. 니 언니는 지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를것이다.]
[아버지도 잘하신거 없어요. 여기 오기 전에도 술 드시고 아프시는 것 때문에 싸웠고, 드시지 말라는게 아니라 아프실때만 좀 쉬시자는건데, 그래서 하루에 두번만 드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셔놓고 안지키신건 아버지시잖아요. 언니랑 저랑 이 여행 어떻게 준비했는지 아세요? 특히 언니가 얼마나 오랫동안 공부하고 준비했는지 아세요? 술, 게임. 대체 뭐가 더 중요하세요? 그리고 자식이 뭘 잘못했다고 생각이 드시면 가르쳐주셔야지 이게 뭐하시는거예요. 가방 내려놓고 언니 데려와서 좋게 대화하세요. 아버지시잖아요. 저희보다 어른이시고요.]
[가르쳐서 되는 게 있고 안되는게 있는 법이니라. 너한테는 미안하구나. 잘 지내다 오거라.]
아버지는 기어이 당신의 고집대로 멀리 타국에서 자식들을 놓고 나가버리셨다.
눈도 안보이고 말도 안통하는 지역에서 대체 어쩌시려고???
걱정되서 언니한테 전화했더니 아버지가 가시는데 뭐 어쩌라고 왜 전화하느냐고 나한테 퍼붓는다.
막상 자기도 걱정되고 나중에 후회할거면서...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짜 막막하고 화나서 울고있는데 언니가 들어와서 왜 질질 짜냐고 혼낸다.
한참뒤에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는데 아무 말 안하고 전화 끊으셨다. 당신 나름의 사과였을까?
걱정되서 다시 전화걸고 동네방네 찾으러 다니고 있는데, 호치민 가는 버스 타셨다고 호치민에 있는 벤탄시장 이름이 뭐냐고 물으신다.
[..... 그건 왜요?]
[아이 노니랑 사야될 것 아니냐. 그 시장 이름이 뭐랬지?]
마치 아무 일 없었는데 일정이 있어서 원래 따로 떨어지기로 했던 것처럼 태연하다.
걱정했던 내가 바보같고, 그 와중에 끝까지 한국에 있는 지인들 챙기시겠다고 노니며 커피며 사겠다고 시장을 묻는 당신의 도리가 숨막힌다.
해외에 와서 술을 물처럼 드시고, 아프다고 약찾고, 같이 좋은거 보러 갔을때는 단독행동, 숙소에서는 말 한마디 안하고 계속 게임.
그래놓고 남들에게는 기념품을 사가겠다고 남을 챙기는 모습에 신물이 난다.
우리에게 가족여행은 사치였을까.
돌아와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당신이 맹신하는 한의학을 딸들인 우리가 의심했다고 여겨져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셨던게 아닐까 추측해보지만
사실 그렇다 한들 아버지의 행동은 지나치다. 매 순간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어서 계획한 여행에서 술과 게임에 빠져 자식들을 방치하고
모든 일정을 망쳐버리고 혼자 편하자고 도망치듯 한국행을 택한 당신의 속도 오죽했겠느냐마는...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아니 어쩌면 평생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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