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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의 여행

나트랑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Your father took a bus to Ho Chi Minh City.]


무엇보다 완벽했어야 했던 무이네의 지프투어에서 아버지의 알콜의존증을 마주하고 각자의 분노와 상처를 다독일 새도 없이 
아버지는 무이네에서 홀로 한국행을 선택했고, 그렇게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아버지는 이 여행 내내 베트남어는 커녕 영어 한마디도 안하고 감사인사조차도 한국어를 고집하셨고, 시각장애인이며, 노인이다. 

혹여 말도 안통하는 해외에서 길이라도 잃으시면 어쩌나... 걱정되는 마음에 온 동네를 이잡듯이 뒤지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호치민 가는 버스를 타셨으니 벤탄시장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도 그때까지만해도 이 양반이 거짓말을 하시고 근처에 계시나보다 싶었고, 대체 어디시냐 모시러가겠다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왜 시장 이름을 묻는데 자꾸 딴소리를 하냐고 벤탄시장 이름 안가르쳐줄거면 됐다며 화를 내고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대체 어디에 계시는걸까, 더운 날씨에 지칠대로 지쳐서 호텔로 돌아가는데 
호텔 로비 직원이 날 부르더니 [너네 아버지 방금전에 호치민가는 버스 탔어.] 

아버지는 대체 어디까지 막무가내인가. 기가 막혀서 이제 더이상 화낼 기운도 남아있질 않다. 

자존심 때문에 아닌 척 하면서도 내심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는 언니한테 얘기해주니 그녀는,

[나는 아까 아빠가 전화와서 아무말도 안하고 끊으신게 우리한테 미안하긴 하고 자존심은 상하고 그래서 그러신줄 알았어. 그 전화 받고 아 내가 잘못했구나 우리가 이러면 안되지 싶어서 빨리 모셔와서 다시 좋게 풀려고 했었는데...... 이젠 모르겠다. 아버지가 뭐 어떻게든 알아서 하시겠지.
하시고싶은대로 하시게 둬야지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겠냐.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일단 뭐라도 먹자 싶어서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숙소 앞 신밧드케밥에 갔다. 
식당 앞에서 점원이 빗자루로 모래를 쓸고 있었는데, 우리가 오는걸 보고도 계속 우리쪽으로 비질을 해서 언니 눈에 모래가 들어갔다. 

눈물때문에 빨갛게 부은 내 눈과, 모래때문에 빨개진 언니의 눈이 우습다. 

입맛도 없고 대충 케밥이랑 망고주스를 주문했는데 이건 음식이 아니다. 
물론 기분이 음식맛을 어느정도 좌우하긴 하겠지만 이건 기분을 빼더라도 사람이 먹을만한 맛이 아닌데? 
한입도 제대로 넘기지 못할만큼 심각한 맛. 싼 가격에 여행자들이 사랑하는 로컬맛집이라더니 이정도 맛이라면 가격도 싼 편이 아니다. 


걱정을 놓을 수 없는 


사실 우리는 당일 저녁에 바로 나트랑으로 이동해야하는데 끝까지 단독행동을 하신 아버지 덕에 뜻하지않은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 
별 수 없이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안에서 나는 손이 언니는 머리속이 분주하다. 

[한국행 비행기값이 얼마지?]
[아버지 지금 돈 얼마 가지고 계시지?]
[아버지한테 호치민에서 지금 탄 버스를 다시 타면 우리랑 만날 수 있다고 우리한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시면.... 
그래서 서로 풀 마음 있으면 다낭으로 오시라고 위치랑 문자로 알려드려.]

[아빠가 됐고 벤탄시장 이름 대라는데?]
[........]

끝까지 걱정을 놓을 수 없었던 딸들에게 아버지가 바라는것은, 지인에게 선물할 침향과 노니, 커피를 살 수 있는 시장의 이름 뿐이였다. 


너무 일찍 기차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밤기차라 원래 일정은 더 쉬어야 되는 상황이였는데 분노와 속상함이 가득한 그 방에 더 있을수가 없었다.
딱딱한 철제의자에 앉아서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둘다 말이 없다. 


베트남 기차는 좌석이 'Hard Sheet' 'Soft Sheet' '6 People room', '4 People room'으로 나뉘는데 
이 기차를 예약하는 사이트는 영어가 안되서 베트남어를 번역기 돌려가면서 몇개월전부터 죽어라 고생해서 
아버지가 힘드실까봐 가장 좋은 4인룸으로 예약을 성공하고 세상 뿌듯했던 막내딸은 주인없는 세번째 티켓만 만지작 만지작.

아버지 인생 첫 침대칸 기차여행의 반응을 궁금해하며 설레했어야 할 두 딸은, 
그렇게 조용히 서로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며 기차를 묵묵히 기다렸다. 



기차는 생각보다 더 좁고 불편했으며 침대 시트는 낡아있었다. 

베트남 숙소+기차에는 진드기가 많은데 아버지는 피부가 약하시니까 두드러기 날 수 있다고 한국에서부터 언니가 챙겨온 스프레이를 뿌리고,
아버지 추우실까봐,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봐 챙겨온 블랑캣을 나눠덮으며 앉아있는데 또다시 입꼬리가 내려간다. 


그 와중에 형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 한국행 비행기 타셨다고 열쇠랑 지갑 가져다달라시는데 무슨일이야?]

사실 휴가 날짜를 맞추질 못해서 형부는 한국에 두고 셋이서만 온 여행이라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아버지 짐을 언니네 집에 두고 온 터라 결국 형부가 연차를 쓰고 아버지를 챙겨서 모셔다드렸다는 얘기를 듣고 형부를 볼 면목이 없어졌다. 

그래도 아버지가 무사히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참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고 앉아있는데 언니가 '쉐임리스'라는 미드가 있는데, 
가난하게 태어나서 밑바닥 인생을 살던 자식들이 알콜중독에 문제만 일으키는 아버지를 강에 빠트려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고 
너무 죄책감에 붙잡혀 있지 말라고, 어쨌든 우리는 아버지를 위해 노력은 했었지 않느냐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준다. 
그것은 언니 스스로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던 얘기가 아니였을까... 


일정대로 이동은 하고 있지만, 내 머리속이 완전히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저 한숨만 푹푹. 

[아버지 한국행 비행기 잘 타셨다니까 남은 기간동안 우리끼리 잘 쉬다가 가자. 어차피 호텔이며 투어며 예약취소도 불가능하고.... 
너 이대로 귀국해서 아무렇지 않게 다시 출근해서 일할 수 있겠어? 감정 추스르고 털어버리고 귀국하는게 낫지.] 


어쩌면 가장 상처와 분노가 클 언니는 그 와중에도 동행인인 나를 챙기며 상황을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리고 나는 항상 그녀의 결정에 따른다. 언니가 한 결정이 틀린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행인가 다행인가


아버지를 위해 챙겨왔던 커다란 블랑캣을 나눠덮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아버지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행 비행기를 탄 그가 먼 타국에서 길을 잃을까 노심초사 하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인걸까. 

[나는 비행기 탔다. 너네 잘 지내다 오고... 여비 남거든 올때 커피랑 노니 5개 5개씩 10개 사가지고 택배로 좀 보내라.
시장에 들릴라고 했는데 비행기 표 끊고나서.... 시장을 못들렀시야]

그의 태평함에 온 몸에있는 세포 하나까지 다 숨을 멈춘 기분이 들었다. 기가 막힌다는게 이런 느낌일까...
여행을 가기 전부터 들떠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랑을 하셨으니 그들에게 줄 선물도 필요하실 수 있지. 

당신이 하루에 4~5번의 술을 드시고, 어지럽고 힘들다는 이유로 이동하는 지역마다 약국과 약을 찾으시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속이 니글거린다고 하셔서 예상에 없던 식비가 추가로 지출되지 않았더라면,
다 떠나 최소한 여행지에서 자식들을 버리고 지속적으로 단독행동을 하다가 종래에는 혼자 사라져서 귀국하시지 않으셨었다면
지인들에게 줄 기념품을 대신 사서 택배로 보내라는 말도안되는 부탁을 하실 이유가 없었을것 아닌가. 

최소한의 미안한 마음도 없으셨구나 싶어 입안이 쓰다. 


우리는 전화를 끊고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깨고 벽에서 바퀴벌레가 한마리 여유있게 기어간다. 

6인실의 베트남 기차에 화장실이 있어서 그 화장실에서 바퀴벌레가 나온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기에 4인실을 고른건데... 
생각해보니 6인실 옆에 4인실이 붙어있으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 


[지금 얼마나 왔지? 답답해서 빨리 내리고 싶어]

그러고보니 기차에 탑승하고 난 뒤로 안내방송이 없었다.
얼마나 갔는지 승무원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문을 여는데 문이 안열린다. 

한참을 낑낑거리다 겨우 문을 열고나니 더이상 문을 닫을 엄두도 불을 끄고 잠을 잘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 기차를 아버지가 안타신게 불행인걸까 다행인걸까..... 

무수한 생각과 함께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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