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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의 여행

비오는날의 호이안

기록적인 폭우도 여행을 막을 순 없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이 말 만큼 정확하게 상황을 표현할 다른 단어는 없을것이라고 확신한다. 
베트남은 기록적인 폭우와 태풍으로 연일 뉴스에 오르내렸고, 강이 범람하고, 도로가 사라졌다. 

다낭에서 호이안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호이안만은 맑은 날씨이길, 평소에는 믿지도 않는 온갖 신에게 기도했는데 신은 공평하다.
필요할때만 찾는 인간의 기도는 신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인지 기도는 별 의미가 없었다.

달리는 차창 밖에 보이는 대부분의 논,밭이 물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 장난으로 저기는 ㅇㅇ호수야 라고 말한다면, 아 그렇구나~ 라고 바로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은 풍경. 

호이안에서의 일정이 괜찮을까, 시작하기도 전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호텔에 체크인하고 짐을 풀면서 잠깐 한숨 돌리는데도 창밖에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올드타운에서 먹기로 했던 점심과 저녁을 룸서비스로 떼워야 하나....
망해버린 첫 피쉬앤칩스가 떠올라 기분이 울적하다. 

한참을 말없이 침대에 각자 앉아있는데 언니가 계획대로 밖에 나가서 일정을 보내자고 한다. 
혹시 오는길에 범람한 강과 홍수로 뒤덮인 논밭은 나만 본걸까? 

우울한 기분 + 찝찝하게 젖은 온몸 = 좋을리가 없다. 

이 공식은 나에게만 통하는 것일까.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무이네 이후로 얼굴이 펴진적이 없었던 그녀가 오랜 고심 끝에 한 제안이라는 것을 알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서 맛있는것도 먹고, 기분좋게 돌아다니기 위해 메이크업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뭔가 전투를 치르기 전에 단단하게 무장하는 기사가 이런 느낌일까. 
외출 전 언니가 내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주고는 흐뭇해한다.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여행지를 고르고, 동행인의 행복에서 만족을 찾는다는건 어떤 느낌일까

호텔에서 우산을 빌리고 걸어나갔는데 오우 쉣

이 비는 우산만으로 될 비가 아니다. 자연은 위대하고 인간은 그 안에서 세상 초라해진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비에 벌써부터 원피스가 젖어오는데 입꼬리가 살며시 내려간다. 

근처 상점에서 평소 좋아하는 연두색의 우비를 사서 입고나니 다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그래. 이 날씨에 외출을 결심했다면 젖는 것으로 일희일비할 수 없어.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올드타운을 향해 걷는데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가롭고 편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적이 있다.

답답한 마음이 들때 가끔은 밖에 비가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은데,
그 생각 속에서조차 나는 실내에서 내리는 비를 보는 입장이지 그 비를 뚫고 어딘가로 가는 입장이 아니였음에도 
오늘부로 시원하게 비가 내리는 날을 조금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첨벙첨벙하며 걸어온 올드타운은 생각보다 좋았다. 

원래 호이안의 올드타운은 날씨가 좋으면 온갖 상인들과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곳. 
하지만 태풍을 동반한 기록적인 폭우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시원한 날씨와 텅빈 거리 

알록달록 예쁜 건물과 푸르고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나무들은 매력적이였다. 

중심가로 들어서니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궂은 날씨라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을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대부분의 상점은 영업중. 

두껍고 오래된 우비를 입고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현지인들
색색깔의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쓴 채로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카페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동그랗고 예쁜 색색깔의 조명들

이들에게 태풍과 호우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고, 어느새 나 또한 거기에 속해있었다. 


아. 조금 더 행복해졌다. 

어쩌면 날씨가 좋은 날보다 더 매력적일지도 모르겠다. 


옷이 젖는것이 싫어서, 비가 와서 숙소에 남아 있었다면 
그래서 룸서비스로 끼니를 떼우며 시간을 보냈다면 절대로 눈에 담지 못했을 풍경들이 기껍고 소중해졌다. 

슬며시 옆을 바라보니 언니도 묘하게 기뻐보였다. 

모자가게 앞에 한참 서서 모자를 살까 고민했는데 가격이 말도 안되게 비싸다.
역시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물건을 사는게 아니야.

가볍게 웃으면서 또 걷고 

예쁜 전등을 파는 가게에서 잠깐 또 멈춰섰다가 
아 저건 집에 가져가면 분명 쓰레기만 되고 말거야. 놓을 곳도 없지 

여행지에서 현실을 떠올리면 기분이 최악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날이 선선했고,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기분좋다. 


체력이 나쁜 편인 나로인해 여행지에서 트러블이 생기곤 하는데, 날이 시원해서 그런지 오늘은 별로 힘들지 않다. 
한참을 돌아다니고 걸어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아직도 체력이 남아있는게 신기할 정도. 

여행지에서는 날씨가 가장 중요하다더니 사실인가보다. 

호이안의 번성했던 과거와 일본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내원교. 

이곳이 유명해지면서 올드타운의 필수 관광지처럼 손꼽히게 되었다고 한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곳이라서 반드시 사진을 찍어야한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많은 사람들이 다리 안에서 셀카를 찍느라 여념이 없다. 

내원교 안은 중국인과 베트남인들로 가득차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에 가려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을 장소에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기뻐하는 그들이 신기했다. 
나라면 최소한 저 구도에서 셀카를 찍지는 않을 것 같은데... 

뭐 그들만 좋으면 된거겠지. 

사실 맑은 날에는 작은 다리 아래에 흐르는 하천에서 엄청난 악취가 올라온다고 하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악취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쓸데없이 복잡하고 사람이 많은 곳을 선호하지 않는 자매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강은 범람했고, 도로와 강의 경계가 사라졌다. 
발을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깊이를 알 수 없는 강으로 빠지게 될지도 모르는 약간은 아찔한 상황.
평소였다면 소원배와 소원등을 파는 상인들이 가득할 강변도 한적하다.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리는 날 등을 띄우는 사람이, 배를 타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어떻게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였을까 
아니면 그냥 늘상 출근하는 출근길에 오른 성실한 사람이였을까 
묵묵히 강변에 배를 대고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의 모습이 대단하면서도 애처로워 보였다. 

도로와 강의 경계가 없는 궂은 날씨에 배를 타고 등을 띄우는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렇게까지 하면서 빌고싶은 간절한 소원은 대체 무엇일까


사실 올드타운은 아버지랑 같이 소원배를 타고 소원등을 띄우고 싶은 마음에 선택했던, 약간은 의미있는 장소였다. 
예전에 태국에 갔을 때 내 저질체력으로 인해 러이끄라통을 놓쳤던게 매우 아쉬웠던 자매가 
아버지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 함께 예쁜 소원을 빌고자 선택했던 여행지였던 것. 

의도치 않았던 아주 커다란 변수로 인해 그게 불가능해졌기에 올드타운으로 가는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는데 
돌아가는 발걸음만큼은 가벼울 수 있을 것 같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조명에 반사된 강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었다. 
비가 그치고 난 뒤에 수면이 올라간 강변에는 조심스럽게 소원등을 띄우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한다. 

언제나 야경은 옳다. 

언젠가 날씨가 좋을 때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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